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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소년은 이야기가 쓰고 싶어서_감수 송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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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마포청년나루 조회수 305회 작성일 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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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소년은 소설가가 되자고 생각했다. 그때에 소년이 아는 이야기란 소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막연한 꿈을 꾸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으며 밤잠을 설쳤다. 어머니가 그만 밥부터 먹으라며 성화를 부리기도 했다. 소년은 이야기가 좋았다. 수업 시간에 그가 쓴 이야기를 읽고 친구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소년은 어떤 운명이나 정언 같은 것을 부여받은 것이다. 영영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지금에 와서 보면 일종의 낙인이 찍힌 것이다. 그러나 넘치지 못하는 재능은 저주와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현혹하고, 놀리고, 희망을 주고 버리고 매달리고 외면하게 한다. 이것은 다가서지 못하게 하고 그렇다고 아주 멀리 떨어지지도 못하게 한다. 지구가 달을 끌어당겨 볼모로 삼듯, 그 곁에 심기는 것이다. 가까이 다가선다면, 이카루스처럼 녹아 사라질 것이다. 그의 날개처럼 불완전함을 알기에. 영영 멀찍이 떠나가기엔, 너무 사랑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짝사랑이다. 미비한 재능은 짝사랑하듯 꿈의 주위를 공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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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위대한 이야기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아는 여자〉의 동치성과 한이연, 〈레옹〉의 레옹과 마틸다,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와 살바토레, 〈러브레터〉의 후지이 이츠키, 독일의 소설가 헤르만 헤세,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 〈쇼생크 탈출〉의 앤디 듀프레인, 한국의 시인 김수영. (그래픽=송승원)




 그것을 깨달은 것은 나름대로 철이 들고 난 후였다. 생각보다 그 사실이 충격적이진 않았다. 어떤 방어기제가 작동하였을 지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아마 더 노력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래선지, 고등학생 때엔 친구들을 꼬여 시나리오 동아리를 만들었다. 지도교사가 필요해서 국사 선생님을 포섭했다. ‘역사물’이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유는 몰라도 후배들도 꽤 많이 들어왔다. 세어 보진 않았지만, 일 년 동안 스무 편 정도 썼던 것 같다. 즐거웠지만, 꿈과 다시 멀어진 것은 고등학교 3학년을 지나면서였다. 현실을 마주하며 꿈을 짊어지는 것은 때로 고통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정확히는 일종의 철부지 행세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현실을 달려가는 아이들 옆에서 꿈을 꾼답시고 으스대는 것은, 마치 나만 철이 들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홀로 멈춰 선 것처럼 다가온다. 우리 사는 세상이 트레드밀이나 컨베이어 벨트라면 멈춰 서는 것은 일종의 도태와 같고 그래서 그 사이에서 꿈을 꾸는 것은 현실감각 부족이 되고야 만다. 그래서 소년은 꿈을 숨기기로 했다. 차마 없애지도, 드러내지도 못한 궁여지책이었다. 그리고 독어독문학과에 진학했다. 그렇게 아주 멀리 떨어지지도, 그렇다고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은 채, 청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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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많던 청년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사진=송승원)




 대학생이 된 그는 한동안 꿈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다. 떨어져 살다가 보니, 금세 4학년이 되었다. 어문학과의 졸업을 앞두고, 눈앞에 펼쳐진 방대한 길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주위를 둘러본들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는 학원 강사가 되었고 친한 동기는 일찌감치 공무원을 붙여놓고 임용을 기다리고만 있다. 무슨 은행에 취직한 선배, 출판사 다니는 동기, 어떤 누구는 몇 년째 전문직을 도전하고 있다. 내몰린 다음에야 나는 이제껏 무얼 해왔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저마다 선택한 각자의 길을 나름대로 열심히 나아가는 이들 사이에서, 비로소 혼자 정체된 듯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막막한 다음엔 내가 저들보다 과연 모자랐는가, 하는 못난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불안과 열등감 따위가 안개처럼 내게 파고들었다. 알량한 것은 그제야 꿈이 생각난다는 것이다. 내몰릴 처지가 되어서야 청년은 내내 외면해 온 꿈에게 다시 한번 봐달라며 읍소를 하게 되었다. KBS 옆에서 드라마 작가 수업을 받고 있다. 처음으로 나의 드라마를 완성해 보기도 했다. 아버지를 찾으러 한국에 온 코피노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뒤늦게나마 이야기에서 벗어나 살 수 없음을 이해하고 있다.


 달라진 것은 꿈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일 것이다. 꿈을 꾼다고 하여 정체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꿈에 젖어서 살 필요는 없다. 그러나 누군가 안개 속에 헤매며 젖어간다면 꿈은 그에게 길을 던져줄 것이다. 철없을 적처럼 꿈에 잠겨 살아갈 생각은 없다. 기필코 이루고야 말리라는 결연함도 더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꿈과 함께 살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드라마는 추동력이 아닌 방향이라는 박지현 작가의 말처럼, 천천히 그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이룰 수도 있고, 부족하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다. 삶이 있은 다음에 꿈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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